<무진기담 이야기 투고> 태양은 안개를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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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그저 시야를 가릴 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런 불편함을 명산품이네, 우리 마을의 장점이네 떠들어대는 무진시의 어르신들이 이상해 보였다. 지금에 이르러서 어르신들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작은 마을의 좋은 것이라 해 봐야 끈적한 쾌락이 낼름이는 유흥가나 직접 체험 가능하다는 따분한 자연밖에 없을 테니 시의 부흥을 위해 말이라도 잘해보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역시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말은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안개를 포장해봐야 안개일 뿐인데.

무진시의 태양은 안개를 뚫지 못한다. 아침에 나를 깨우는 것은 따스한 햇빛의 눈부심이 아니라, 오래된 자명종의 알람 소리였다. 골이 울릴 정도로 시끄럽게 울리던 자명종은 어느 순간 저 스스로 뚝 그쳤다. 수명이 다한 것이다. 나는 이젠 초침조차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기계는 때리면 고쳐진다는 늙은이들의 속설이 생각나 툭툭 건드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계를 건드렸던 나의 손만이 옅은 붉은빛을 띨 뿐이었다. 나는 시계를 다시 작동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거실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공간에서 물통 몇 개만이 굴러다녔다. 물통의 뚜껑을 열고 입을 댄 채로 남은 물의 절반 이상을 들이켰다.

"야, 너 또 입 대고 마시냐?"
"네 알 바냐?"
"응~ 나 알바 안 해~"

희가 방금 일어난 듯 배를 긁적이며 방문을 엶과 동시에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지랄한다."
"흐, 말 존나 심하게 하네."

나는 그녀의 말에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물통을 냉장고 안에 던져넣었다. 나는 조용히 냉장고 문을 열어 집어넣은 물을 다시 꺼내 마시는 희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겨 옷장의 앞에 섰다. 목 부분이 전부 늘어난 하얀 반팔과 패션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찢어진 청바지가 눈에 띄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다. 나에게 외출복이란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나가냐?"
"어."
"어디로."
"밖."
"잘 다녀와~"
"어."

짧은 문답, 정보 없는 대화. 그것이 나에게 있어 일상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질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더 알 필요도 없었고, 그녀에게 나를 더 알려줄 필요 또한 없었다. 희가 힘없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얇은 옷을 걸친 그녀의 흉부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현재로선 딱히 생각이 없었다. 막 일어난 상태라 의욕도 성욕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을 줄인 채 문을 열고 밖을 향하니 놀랍도록 시린 바람이 나를 슥 지나친다. 털이 빳빳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겨울이었다.

무진시의 겨울은 특히나 추웠다. 햇빛이 들지 않는 무진시의 길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무진시의 바람은 여름에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내 선풍기의 그것보다 거셌다. 옷이 없다는 이유로 반팔을 입고선 그 추위 속으로 걸어 들어간 나는 곧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희의 외투라도 가져 나올걸.' 하고 말이다.

"하…"

막막한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입김은 안개에 섞인 채로 햇빛이 보이지 않는 옅은 하늘 속을 비행했다.

-우우웅 우웅 우우우웅
"아! 이씨 깜짝이야…"

멍하니 입김이 흐트러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핸드폰의 진동이 주머니를 울렸다. 딱딱하게 굳은 손은 주머니의 구멍을 찾느라 바지춤에 몇 번을 헛손질한 후에야 핸드폰을 집을 수 있었다. 겨우 집어든 핸드폰의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검게 적혀있었다. 희외 최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푹 집어넣었다. 물론 몇 번의 헛손질을 다시 행해야 했지만 말이다.

-우웅

이번에는 진동이 짧게 울리다 그쳤다. 문자였다. 다시 한 번 헛된 행위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어올라서 나는 문자를 무시하기로 했다. 집에서 몇 걸음 걷지도 않은 채 핸드폰과 씨름을 하던 나는 드디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몸을 움직이다 보니 약간의 열이 올라 꽤나 따뜻해졌다. 아니, 오히려 약간 더울 정도였다. 어제 티비에서 본 대로라면 영하 5도의 기온일 터인데. 의문스럽게 팔을 문지르고 있자니 지팡이를 툭툭 바닥에 내리치며 길을 걷던 한 늙은이가 나에게 그 지팡이를 겨눴다.

"이… 이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선, 춥지도 않은 게냐!"
"시끄럽습니다. 저도 후회 중이니 조용히 하십쇼."
"뭐? 하여간 요새 젊은이들은 어른에 대한 예의가 없어. 내가 너 나이일 땐 어른 그림자도 못 밟았다고."

빛도 잘 들지 않는 곳에서 그림자는 무슨. 늙은이는 나이대에 맞지 않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설교를 시작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잔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나는 픽 웃고선 그를 지나쳤다. 본인의 설교에 심취한 나머지 내가 그를 무시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늙은이가 소리쳤다.

"야 야, 이… 싸가지 없는 놈의 자식이! 어른들 말 무시하다 큰코다치는 거야!"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손가락 네 개를 접어 중지만을 남겼다. 뒤에서 시끄럽게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나는 귀를 닫았다. 그 이후로 주택가의 길을 걷는 동안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사람이 그리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 안개 때문일 것이다.

길을 완전히 통과하자 쾌락과 환각에 절어있는 사람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안개 속 곳곳에서 질펀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골목은 쳐다보기 힘들 정도의 역한 냄새가 풍겨왔으며, 모든 건물의 창문은 싼티나는 커튼으로 막혀 있었다. 숨이 턱 막히도록 끈적이는, 퇴폐적인 분위기였다. 나는 이유 모를 불쾌감에 휩싸였다. 남자와 여자가 살을 섞는 곳에서 혼자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또한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
"왜?"

아무런 생각 없이 유흥가에서 일하는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누군가 귓가에 입을 댄 채로 대답했다. 고막에 바람을 직접적으로 불어넣는 듯 한 그의 말에 온통 소름이 끼쳐 재빠르게 그를 밀쳐냈다. 최는 균형을 잡느라 두어 발자국을 뒤로 움직이며 팔을 휘적여야 했다. 나는 기분이 더러워져서 새끼손가락을 귓구멍에 집어넣은 채 빠르게 긁어댔다. 최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마냥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머리를 자르기 귀찮다는 이유로 허리까지 머리카락을 기른 남자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인이 불러놓고선…"
"시끄러워. 빨리 주기나 해."
"현생을 살아, 현생을 새끼야. 그리고 이번에는 얼마 못 줘. 공급원이 줄어들어서 가격이 올라갔거든. 조만간 넌 아예 못 사게 될 지도 모르겠네."

숨이 멎을 정도로 불행한 소식이었다.

"그건 그렇고 안 춥냐? 남는 담요 하나라도 줘?"
"괜찮아. 안 추우니까."
"으. 보는 내가 추운데."

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는 자신의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최는 이미 두꺼운 옷을 몇 겹이나 입었는데, 그 모습에서 그의 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진시는 가시거리가 좁기 때문에 범죄와 관련된 행위가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활성화된 위법행위는 마약 밀매였다. 마약은 이런 유흥가에서 특히나 많이 거래되는데, 최는 그것을 사고파는 중매쟁이 중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덕분에 나는 싼 값으로 마약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곧 옛날 이야기가 되겠지. 거지가 마약은 무슨 마약. 한숨 섞인 입김이 주황 안개에 섞여들어갔다.

무진시의 마약은 주황색 연기의 형태를 띤다. 연기는 안개와 섞여 공기 중에 자연스레 퍼지게 된다. 때문에 유흥가의 안개는 주황빛을 띠며, 거리에 들어오기만 해도 몸이 달아오른다. 일부 약이 잘 받는 사람들은 환각을 보기도 한다더라. 다만 부작용은 없단다. 부작용 없는, 중독성만 존재하는 마약. 동화 속 이야기도 아니고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소비자를 너무 개돼지 보듯 하더라.

"그거 아냐?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여기저기서 사람이 사라진다고들 하더라."

최는 갑작스레 그리 말했다.

"인신매매인가?"
"아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고.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사람도 모르게."
"대단한 납치범이네."
"그러니까 납치가 아니…! 하아… 아무튼 그냥 조심하라고."

최는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했다. 나는 손을 펴 앞으로 슥 내밀었다.

"악수?"
"마약, 미친 새끼야."
"아."

최는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내 정신 좀 봐.' 그는 그리 중얼거리며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 도달한 곳은 한 유흥지점의 작은 방이었다. 그는 방의 책상 위에 향로를 턱하니 올려놨다. 이것이 뭐냐는 눈빛으로 최를 쳐다보고 있자니 그는 '서비스야.'라고 말하며 방을 나섰다. 그가 방을 완전히 나서자 화려한 무늬로 치장된 금빛 향로의 뚜껑을 열었다. 주황 연기가 향로의 바닥에 뭉친 상태로 몽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향로의 안에 불을 붙인 채로 뚜껑을 도로 덮었다. 연기는 금세 방을 가득 채웠다. 방은 곧 몽환적이며 비현실적인 공간이 되어, 바깥과는 단절되었다.

곧이어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잠들 것만 같았다. 조금 더 또렷한 정신으로 마약의 쾌락을 만끽하고자 눈을 부릅뜨려 노력했지만, 이미 눈꺼풀은 나의 의지를 벗어난 상태였다. 채 삼 초도 되지 않아 눈이 감겼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익숙하게도 낡은 천장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내 전신을 훑는 듯한 소름끼치는 감각과 그에 동반되는 쾌락이었다. 지끈거리를 머리를 누른 채로 몸을 일으키니 전신에 덮여있던 이불이 스르륵 내려갔다.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핸드폰을 열어보니

'제발 우리 가게에서 알몸으로 자는 것 좀 그만해줄래?'
2000/1/24 23:27 수신 완료

라는 최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새끼야.'라고 전송하고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심한 기시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채…

"추워 새끼야…"

졸지에 이불이 사라진 희가 옆에서 갑작스레 중얼거리며 이불을 도로 끌어 올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 밤을 함께한 듯 싶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히고선 일어나 앉았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감지 않아 버석이는 뒷머리를 긁고 있자니 극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마약의 부작용은 아니었다. 일평생을 약으로 절어 지냈는데 몸에 이상이 있던 적은 없었으니. 냉장고를 열자 이젠 바닥을 드러내는 물통 한 병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물을 다시 떠 와야 하나. 물통을 들어 내용물을 마시면서도 쓸데없이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하니 몸이 축 처지고 무기력해졌다.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 따라 의욕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나는 침대에 툭 걸터앉았다. 침대가 흔들리며 누워있던 희의 몸도 같이 움직였다. 그녀는 그것이 불만이었는지 약한 힘으로 나의 등을 툭 쳤다. 나 또한 약한 힘으로 그녀의 다리를 툭 쳤다. 둘은 실없이 웃어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다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할 거야?"
"아니, 그냥 이대로 잘래."
"뭐야 그게. 고자 새끼야."

내가 푹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작게 웃었다. '어제 일은 기억나냐?', '응, 안 나.', '사실 나도 그래.' 둘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나와 희는 추운 날에 서로의 체온에 의존하여 슬쩍 잠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땐 나 혼자였다. 손에 종이 하나가 바스락거리며 잡혔다. '일하고 올 테니까 굶어 뒤지진 말고! 밥 사준다는 말은 아니야!' 그렇게 적혀있었다. 희다운 말투였다. 종이를 보며 웃다가 물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다가 다 해진 청바지와 늘어난 반팔을 입었다. 분명 오늘도 이대로 나간다면 후회를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담요 하나를 어깨에 걸쳤다. 화장실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돌렸지만 이미 끊긴 물이 나올 리 없었다.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물이 나왔더라면 굳이 밖에 나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나는 수도꼭지를 몇 번이나 더 돌리고 나서야 미련을 떨쳐낼 수 있었다. 냉장고 밖의 구석에 굴러다니던 수통을 몇 개 챙겨 비닐봉지에 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여전히 뼈를 깎는 듯한 살인적인 추위가 나를 반겼기 때문에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손목에 걸치고 양손을 옆구리에 끼웠다.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지만, 옆구리에 넣은 손을 다시 빼는 것도 귀찮았기에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북이와 사촌 관계를 맺을 정도로 느린 걸음을 통해 도달한 곳은 약수터였다. 물이 담겨 있는 곳은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새로 나오는 물을 받아 마실 테지만 그마저도 하기 싫었던 나는 살얼음을 깨고선 수통을 푹 담갔다. 분명 이쯤이면 늘 보던 늙은이들이 '왜 더럽게 수통을 물에 담그고 지랄이야!'라고 소리칠 때가 됐을 텐데. 나는 의문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마침 사람도 없겠다, 고개를 숙여 수면에 입을 댄 채로 물을 꿀꺽이며 마셔댔다. 약수의 시원함이 위장을 얼리는 듯 했다.

"캬아~"

시원하다. 물을 몇 번 더 마시니 배도 별로 고프지 않게 되었고, 다리도 아픈 김에 약수터 근처의 정자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봤다. 나는 다시 집으로 걸어 돌아갈 생각에 의욕이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멍하니 안개의 흐트러짐을 주시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해가 더 진다면 겨울에 반팔을 입고 야영을 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귀찮음이 심하더라도 얼어죽는 것은 피하고 싶었기에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 도달하니 웬일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책을 읽고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맞아요. 사람들이 무진시는 없는 곳이라고 저한테 막 화내더라구요."
"반가워. 외지인은 오랜만이거든."
"오빠 잘생겼다. 몇 살이야?"
"네? 어… 스… 스물일곱이요…"

한 청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무슨 일인지 확인해볼까, 하다가 수통이 너무 무겁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냥 집으로 걸음을 돌렸다. 바깥에서 온 잘생긴 문학청년이라, 확실히 유흥가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꽤나 있을 것 같긴 하네. 돈만 잘 번다면 말이야.

"왔어~?"
"어."
"오늘 밖이 시끄럽던데."
"밖에 어떤… 아니야."
"뭐야, 궁금하게 말 끊기 있냐?"
"있지 그럼."

나는 퉁명스레 그리 대답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옥이 기억나?"

희가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옥이?"
"나름 잘생겼던 애."
"기억 안 나."
"그런 애가 있었어. 아무튼, 걔가 무진시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냈더라고."

쓸 게 없어서 이런 곳을…?

"그래서 그런지 무진시에 오는 사람이 꽤 생겼어."
"…잘됐네."

어차피 안개 외엔 특징조차 없는 곳. 저들도 금세 질려 돌아갈 것이다. 옥이라는 사람이 어떤 미사여구를 곁들여 무진시를 포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실체를 직접 본다면 실망할 테지.

"염세적인 새끼야,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내가 생각을 내뱉자 희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아무튼, 그랬다고. 내일은 일 안 나가니까 일찍 자야지."
"보통은 일 나가기 전날 일찍 자지 않냐."
"내 맘이야, 씨…"

희가 장난스레 말하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와 이리 긴 대화를 나눈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늘 입이 험하던, 그러나 무기력하고 힘이 없었던 희가 조금 변한 것 같아 막연히 무서웠다. 허나 그녀의 변화에 대해 뭐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희와 마주해야 할지 몰라 거실 바닥에 대충 이불을 깔고 누웠다. 바닥이 차가웠다.

어째선지 늦은 오후가 되어 잠에서 깨었다. 자명종 시계가 고장이 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핸드폰 알람은 희가 도중에 끈 것인지 나의 핸드폰이 그녀의 손에 잡혀 있었다. 나는 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내 문자가 온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최에게서 한 통의 부재중 전화, 그리고 몇 개의 문자가 온 상태였다.

''최'에게서 부재중 전화 1통'

'오랜만에 손님이 많았어. 마약을 찾지 않는 손님 말이야. 언젠간 무진시의 바깥에서도 유흥업을 해보고 싶네. 마약 없이. 안개 없는 곳에서 마약을 다루기엔 내가 너무 쫄보거든.'
2000/1/25 21:28 수신 완료

'그건 그렇고, 어제는 우리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대량으로 실종됐어. 이젠 진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몸 조금 사리려고.'
2000/1/25 21:30 수신 완료

'어 뭐'
2000/1/24 21:31 수신 완료

순간적으로 몸이 덜컥 굳었다. 평소대로라면 농담이라 치부하고 웃어넘길 수 있을 만한 문자였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최가 납치를 당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을 빠르게 일으켰다. 바닥에서 잤기 때문에 약간 아픈 등을 무시하고 다 해진 신발을 구겨 신었다. '무슨 일이야~?' 느릿하게 묻는 희의 말에 대답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현관을 열고 나가 찬바람을 뚫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더웠다. 이상하게도 미칠 듯이 더웠다. 심장이 파리의 날갯짓보다 빠른 빈도로 뛰었다. 아니, 사실 무엇인가 놓치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것일 터인데.

나는 유흥가에 도달하여 최를 찾아댔다.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마약쟁이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최의 가게에 들어갔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손님도, 심지어는 직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최… 최 어디 갔는지 알아?"
"최씨가 누군데?"

내가 물어보자 한 남자는 의문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다시 질문했다. 나는 헉헉대면서도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몰라. 어디 잡혀가기라도 했겠지. 마약쟁이들 하나 둘 사라진다고 뭔가 달라져? 그건 그렇고 숨 좀 돌려."

나는 그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처음 보는 인상의 사내였다.

"… 여기에서 오래 살았어?"
"아니, 얼마 전에 왔어. 살다가 지쳐서, 어쩌다 보니 들어오게 됐네."

나는 남자를 밀쳐냈다.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막연한 분노가 치솟았다.

"마약쟁이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 좀 가져서 하지?"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 뭐 다르겠나."
"최는…!"

나는 그에게 더욱 화를 내어 몰아붙이고자 했지만, 순간적으로 힘이 탁 풀렸다. 그렇지, 이곳에 사는 사람은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최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나에겐 그에게 최의 모습에 대해 잘 설명할 말재간도, 그의 장점을 나열할 열정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를 부리며 말을 끝맺었다.

"최는… 달랐다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무기력에 의해 바닥 저 밑으로 가라앉았다. 터덜터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주택가에 들어서자 다시 회색 빛깔으로 돌아온 안개가 나를 비웃으며 유유히 흘러갔다. 아무도 없었다. 나에게 소리치는 늙은이도, 높은 톤으로 수다를 떠는 아줌마도, 그리고 언제나 길바닥에 누워 숙면을 취하던 노숙자들조차도.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저벅, 저벅.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낯익은 사람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돌아본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전날에 보았던 문학청년의 얼굴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새로운 얼굴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나는 피부가 온통 하얀, 잉크 냄새가 나는 청년의 멱살을 잡았다. 이들이었다. 이들이 온 이후로부터 사람이 점점 사라진 것이었다. 청년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가식적인 표정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그리 말하며 양손으로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그의 얼굴은 붉었다. 타오르는 붉은 빛이었다. 나는 청년의 손을 쳐내고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집어 삼켜질 것만 같았다. 정열적인 태양의 불빛이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지 않고 집으로 달려갔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으며 입에선 단내가 났다. 신발은 어느새 벗겨졌는지 맨발로 달리고 있었기에 발바닥에서 고통이 올라왔다.

정적.

나는 숨을 조금 골랐다. 머리를 조금 식혀… 아니, 조금씩 느껴지는 불안하고도 수상한 느낌에 나는 집의 모든 방문을 열어보았다.

정적.

"희는…? 희는 어디로?"

정적. 참을 수 없는 정적.

"이런 장난 평소에는 안 치잖아… 뭐야, 오늘 내 생일이야…? 희?"

나는 집 안을 뒤져댔다. 장롱과 화장실, 부엌의 찻잔, 심지어는 냉장고 안까지도. 집 안이 발바닥에서 조금씩 베어나온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있던 것은 오늘 아침까지 그녀와 함께했던 침실의 침대 위였다. 아직 따스함이 남아있는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희미하게 그녀의 냄새가 났다.

"진짜 씨발… 장난치지 말라고…"

종이 한 장이 의욕 없이 나풀거리며 바닥에 내리앉았다.

'오늘 낮에 어딜 그렇게 급하게 나간 거야? 나도 깜짝 놀라서 일어날 뻔했잖아 새끼야. 그건 그렇고 어젯밤에 밖에서 외지인이랑 창부들이 어딘가로 떠나더라. 나도 언젠간 무진시를 떠나고 싶어. 조금… 조금 더 사람처럼 살고 싶네. 몸 말고 다른 걸 파는 일을 하면ㅅ'

글은 그렇게 끊겨있었다. 모음을 잃은 자음이 외로이 적혀있었다. 침대에서 적은 듯 삐뚤빼뚤한 글씨에 침대를 뒤적였다. 나오는 것은 잉크가 거의 떨어진 펜 하나뿐이었다. 희를 쫓아 바깥으로 나갈까? 하지만 내가 무슨 권리로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거지? 나는, 무진시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몸을 일으켰다. 현관을 열고 몸을 밖으로 빼냈다. 다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다 죽은 눈으로 안개 속을 응시했다. 안개가 사람을 가리고 있었지만, 가릴 것이 없는 안개는 이제 햇빛만을 막을 뿐이었다.

무진시의 사람들은 차근차근, 꾸준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매미가 울기 시작할 무렵, 우리 마을은 내 마을이 되었다. 무진시의 다른 마을을 찾아가 볼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정말로, 그저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곳에서도 존재하는 사람이 나뿐일까,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진시의 마을을 기대하고 들어온 사람은 이내 실망하고 제 집으로 돌아가 글을 적을 것이다. '무진시에는 안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외지인조차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무진에서 살았던 사람은 이제 없다.

무진으로 들어오는 사람 또한 이제 없다.

몇 안 되는 사람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존재가 된 무진시였다.

나는 안개 속에 홀로 남아 사무치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맞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모두는 제 갈 길을 찾아서 떠나갔으며, 더 이상 몽상과 환락에 몸을 싣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막연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무진시에는 제대로 된 볕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유령의 주택가를 지나쳤다. 주황빛 안개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는 유흥가는 또한 주택가와 다름이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체액만이 이곳에 사람이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랬듯 이유 모를 불쾌감에 휩싸였다. 남자와 여자가 살을 섞는 곳에서 혼자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유흥가에서조차 열기를 찾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핸드폰을 들어 나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당연하게도 전화음만이 들릴 뿐, 그 건너편의 사람에게는 닿지 않았다. 왠지 모를 실망감이 일었다. 나의 전화번호를 대상으로 문자를 보냈다.

'받아.'
2000/13/32 25:61 발신 중… 처리되지 않음.

여전히 답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안개에 막힌 햇빛이 쨍하니 비추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열기는 무기력함을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무도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자.

태양은 안개를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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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ortal:abyshroom ( 27 Aug 2020 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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