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농민들의 삶 개선 및 경제적 소득 증대
우루과이 라운드, IMF, 몬산토 사태 등, 여러 농업 위기 속에서 정부는 농민들에게 무심한 것을 본 농업 연구원들이 농민을 위한다는 목적아래 만들어졌다. 농민을 위해서라면 변칙적인 현상, 개체들도 사용해야 하며 이를 막고 있는 피어슨 늑약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중.
1973년 7월 - 식물환경연구소를 농업기술연구소로 개칭->재단 휘하 변칙 농업 부서 인원 합류, 통일벼에 퍼지고 있는 변칙 식물병 대처
1970년대 중반 - 재단과 한국 정부간의 갈등 심화. 재단 인원 철수. 하지만 변칙 관련 정보들은 여전히 연구소 휘하 인원들에게 인식되어있음
1970년대후반-1980년대 중반 - 농민들의 삶 피폐에 대한 연구원들 내부에서의 회의론 대두, 피어슨 조약으로 인해 한국 정부 대변칙 대응 농력 상실에 따라 연구원들의 연구소 이탈. 이탈 인원들 중 일부가 뭉쳐 변칙 식물 관련 연구 지속(자립농학연구조합)
1994년 -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남아있던 원로 연구원들의 대거 이탈. 자립농학연구조합의 반정부화 및 외부 변칙 조직(일생창연, 능손 등)들과의 연계, 이는 곧 재단에 감지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 - IMF로 인한 농업 연구 인원들의 대규모 실업, 이 인원들이 자립농학연구조합에 합류. 몬산토 종자권 사태로 자립농합연구조합은 두레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부에 대한 비난과 농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 것을 선언
2010년 대 - 재단 한국 사령부 혼란과 한국 정부의 대변칙 대응 능력 부재에 따른 조직 성장기.
방재원과의 관계를 제외한 대략적 연표
재단-정부 협업으로 연구원을 차렸고
183KO 해결한 뒤 재단과 정부가 해당 연구소를 닫으려 하자 반발하여 이탈 (기존 설정에서도 틀린 말 아님)
이탈한 뒤 몬산토사태, 우루과이라운드 겪으며 현재의 두레원으로 발달
내부에는 재단 한국사령부와 협조가 불가피하다는 입장과 양립하기 어렵다는 입장이 갈리고 있음
IMF 이후 합류한 연구원과 소작농들로 인해 인원수가 크게 늘어남.
연구원:농민=3:5 비율
대의원 제도. 농협 조합원과 달리 임기제가 아니라 어떤 안건 발생시, 해당 안건과 관련된 농작물 재배 농부, 혹은 연구원들 중 한명이 대표로 선출되어 안건이 해결될때까지 유지. 통상적으로 안건당 대의원 5-7명 정도 선출
원장은 1대 연구원 출신(우장춘 박사 직속 제자)->2대 연구원(외부인사 출신, 일생창연과의 연줄)->농민출신(우루과이 라운드 이전부터 있던 농민. 두레원 설립자)->4대 연구원(농업기술연구소 막내, 농촌 가정 출신, 가정사덕에 연구원임에도 농촌과 농민들의 실질적인 삶에 빠삭함) 이 부분은 좀 더 이야기가 필요할듯
조직 상징
호미를 든 손
조직의 목표
1. 국내 종자 다양성 추구
2. 국내기후변화에 맞게 변화하는 종자자원 확보
3. 농업 종사자들의 자체 생존성 확보(1970년대 이전)
4. 국내 작물의 세계화(북방 한계선과 사막기후에서 벼농사 등)
조직 시초
1. 조선초
1-1. 정도전의 건국 팀중 하나
1-2. 세종의 비밀 조직
2. 근현대
2-1. 우장춘박사와 휘하 연구원
2-2. 재단과 박정희 정부 합작 조직(글래시즈님 제안)
수익원
농협중앙회
1. 가치제안
1. 국내 종자 다양성 추구
2. 국내기후변화에 맞게 변화하는 종자자원 확보
3. 농업 종사자들의 자체 생존성 확보(1970년대 이전)
4. 국내 작물의 세계화(북방 한계선과 사막기후에서 벼농사 등)
2. 핵심활동
1. 변칙 비변칙을 아울러 농업 관련 현상, 해당 연구 결과의 실농업 접목 가능성 연구
2. 극한 기후, 토지에 대한 적응성 연구
3. 종자 다양성 확보 연구 및 초장기간 보관 방법 연구
3. 핵심자원
1. 우장춘 박사와 휘하 제자 박사진
2. 중앙정보부 초상부서와 SCP재단 농업부서(부분적으로 활용 가능. 피어슨 각서 작성후 파기)
3. 파블롭스크 실험국(GRU P부서를 통한 협력관계. 전 정부때 이로 인한 간첩파동 발생)
4. 세종때의 자료들?
4. 핵심파트너
1. 한국정부(초상방재청을 통한 관계 재구축 협의중)
2. 재단(XK 세계멸망 시나리오시 종자 복원을 위한 초장기 보관법과 극한 상황시 작물재배법 공유 조건 지원 요구)
3. BE(손절 준비중)
5. 고객관계
X
6. 마케팅 채널
X
7. 고객 세그먼트
X
8. 비용구조
대부분 연구비용과 토지대여비용으로 지출중
9. 수익구조
농업협동조합을 통한 출자배당금
재단 박정희 정부 협력통한 통일조직 탄생
피어슨각서 후 정부와 관계 소원
파블롭스키 연구소와의 관계로 전두환정부와의 관계 악화
몬산토 사태로 절연 선언 BE와 능구렁이손과 접촉
초상방재청 설립후 관계 재성립을 위한 협의 진행중
참고사항
http://m.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60865.html?_fr=tw#cb
마침 BE 태동이 97년이니
http://ko.scp-wiki.net/m-a-2407
82년도 농협-중공업발전-피해는 농민-획기전 소득자원-제안 뭘로받을래?-지원은 얼마나 해줄테니 전국농산물 출하를 농협에서 컨트롤-농협 거부-무산
이름은 두레원으로, 조선 기원은 포기하는걸로 해서 다시 수정하도록하겠습니다
신세대와 구세대 대결
-농민 중심은 동일, 구세대는 농촌이 곧 농민이므로 농촌 발전 강조. 신세대는 호미를 든 자가 곧 농민이니 농민 자체 강조
-구세대가 주력이므로 신세대의 힘은 약하나 적극적으로 요주의 단체와 접근하여 활동중-현재는 수신도와 협력 확인-수뇌부는 기겁중
(디코 회의 결과)
1. 초상연맹조합계 (초련계, PU) - 합리한 피어슨 규약을 개정해 변칙농업이 설 자리를 달라는 제한투쟁
1-1. 초련계 친방재원파 (PUPN) - 방재원과 협력해 초상농업조합 두레원의 활동을 이어가며 12.5 체제 안에서 농민의 이익을 꾀하자는 협조노선
1-2. 초련계 반방재원파 (PUAN) - 현불가능하지만 현 12.5 체제 역시 부족하다 보며, 제대로 농업인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형태로 재차 개혁해야 한다는 중도개혁노선
2. 자유농민계 (자농계, LF) - 초상이든 뭐든 농업에 유익한 건 농민이 자유롭게 쓸 권리가 있다
(글래시즈님 제안)
딴집살림 안차렸으면 서로 어느정도 합쳐서 가긴 가는 거고
같이 일하되 생각은 다른 거고
변칙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알고있으니 서로 살깍아먹는 비난전 등은 자제하고 상부상조하되
다른 방향으로 서로의 몸짓을 불리고 자농계쪽은 요주의 단체와의 접촉이 불리는 방법중 하나다.
계파는 있되 어디까지나 내부 의견들 중 큰 갈래로서 있을 뿐 이로인한 내부 갈등은 없다-있으면 두레원인 진즉에 해산됐을것
두레원과 돌림병 돈 설정
ㄴㄴ 배포가 막 잘 되려는 차에 병이 발견돼서
정부가 국가차원의 식량안보위기 + 정권 치적사업이 날아갈 위기에 극단적으로 대응한 걸로 하죠
통일벼 변칙농해 사건은 마무리되고 재단이 발 뺀 뒤에
여튼 재단이 빠지고 연구원들도 박차고 나가면 조직의 초상 사정은 세척되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농업기술연구소는 그대로 국책연구원으로 남아
1994년 연구소 통합으로 농업과학기술원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고
박차고 나온 연구원들이 따로 세운 게 지금의 두레원이다!
http://www.naas.go.kr/04_intro/Intro_Greeting.do
http://www.naas.go.kr/
우장춘 (1898년-1959년) - 농학
약력
1898년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 사이에 출생
1916년 히로시마 현립 구레중학교 졸
1916년 도쿄제대 농학부실과(동대에서 운영하는 전문대 같은 곳) 입학
1919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졸업
1920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기수
193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1937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기사, 다음날 사임.
1937년 교토 다키이 연구농장장 1945년 다키이 연구농장 사임, 교토 장법사(절간)에 칩거
1950년 귀국 (일본인 가족들은 반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장 (연구소 이름만 바뀜)
1954년 학술원 추천회원 피선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 과학상 수상
1957년 원예시험장장 (연구소 이름만 바뀜)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 수훈. 다음날 사망
통일벼와 산림녹화의 공통점
대통령의 관심
과학자에게 연구 시킴
다수확 벼, 속성수 개발
시험 거치지 않고 바로 농지, 국토에 적용
농민, 산주가 거부할 수 없는 준강제적 조치
수치적으로는 원하는 결과
70년대 조국 근대화, 체제경쟁에서의 승리, 가난 탈피의 상징
그 비용은 농민과 산주들의 부담으로 떠넘김 (정부는 쌀이 증산되었다고 그러는데 농민은 갈수록 가난해짐)
개발독재 시기 농업진흥의 문제점은 이런 것이 있었고
"정부는 쌀이 증산되었다고 그러는데 농민은 갈수록 가난해짐" <ㅡ 이게 핵심이라면 핵심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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