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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9 우리가 사라져, 사라져 버리면 가는 곳
001 과거와 미래
니체 사상과의 접점
두려움을 알면서 두려움을 제압하는 자, 심연을 보지만 자긍심이 있는 자가 대담한 자다.
심연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보는 자1, 독수리의 발톱으로 붙잡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손들의 행성의 존재이하 001의 철학은 니체철학과 맞닿아 있다. 패자의 희생으로 인해 승자가 존재할 수 있고, 그렇기에 승자는 패자를 사랑한다는 대목은 니체가 강하게 비판한 기독교의 도예도덕을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약자의 종교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영향에 의해 근본적으로 강자를 악, 약자를 선으로 본다. 그러나 사실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고 오히려 불건전한 발상이라는게 니체의 견해이다.
토끼와 독수리의 관계를 보자. 토끼는 독수리를 증오한다.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는 존재이기에. 그러나 독수리는 토끼를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한다. 토끼의 희생 덕분에 자신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001은 인간을 완벽히 독수리의 관점으로 본다. 그렇기에 인간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인간의 희생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으니 001은 자식의 마음으로, 인간을 어머니로써, 즉, 무한정으로 자신을 위해 베풀어주는 존재로써 사랑한다.
과거와 미래를 니체적 관점에서 더 살펴보자.
니체가 말한 개념중 아모르 파티와 위버멘쉬가 있다. 아모르 파티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자체를 사랑하라는 말이고, 위버멘쉬는 직역하면 넘어선 인간이라는 뜻이다. 위버멘쉬는 즉, 자신을 증오하는 것을 넘어 마치 어린아이처럼(001이 O5-2의 꿈속에 나타난 모습?)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단계에 이른 인간이다.
001은 인간에게 자신의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자신이 001을 위해 희생되는 순교자로써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001은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며 인간을 찬양하는 명절까지 존재한다. 니체 철학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에서 어쩌면 가장 위버멘쉬에 가까운 사람은 문턱을 향해 뛰어든 사람들이 아닐까?
하지만 니체는 아모르 파티와 위버멘쉬를 그저 현재의 불행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걸 포기하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 속 진정한 위버멘쉬는 누구인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고(2303은 운명을 거스름 그 자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001에 한방을 먹인 하시와 아우렐리오는 위버멘쉬가 아닌가?
아니면, 아우렐리오는 자신의 죽음 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인 위버멘쉬인가?
O5-2는 자살을 통해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피를 했기 떄문에 일단 확실히 위버멘쉬는 아니라 볼 수 있다.
아니면 001은 이미 그 자체로써 위버멘쉬이고, 문턱의 그 남자를 통해 인간을 자신과 같은 위버멘쉬로 탈바꿈하고자 한 것일까?
문턱의 그 남자
작가 칼리닌은 전부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호아킨 파블로 이스키에르도 산 데 펠리페에서도 보르헤스가 언급되기도 한다.
게다가 문턱의 그 남자(재단에선 끝에 다다른 남자로 표기되어 있음[미번역]) 보르헤스의 단편 문턱의 남자를 패러디한 제목이다.
'문턱의 남자'에서 '문턱'이란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문의 경계면이다.
2303에 관하여
루리웹 Kaltzkalintz의 해석
출처
2303은 001이 인류의 지식을 추출해 말소시켜 발전을 느려지게 하기 위한 시설.
즉, 완성되어야 할 더 나은 현실이 실현되지 않게 함으로써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네이버 꿈꾸는 소수인님의 해석
출처
재단이 001을 격리/청산하려 던 게 실패한 현실이 2303에 구현되고, 하시와 아우렐리오가 그것을 실현시켜 001을 파괴하는데 성공한다.
자세한 건 문턱의 그 남자와 하시와 아우엘리오를 몇번 더 읽어봐야 할 듯 하다.
- portal:navla ( 10 Sep 2020 0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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