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예술사: 쿨한 세계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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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로 작품 합성하는걸로

변칙예술사

쿨한 세계를 향하여


변칙예술 평론가 니콜라스 호퍼


변칙예술의 역사는 예술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기원전 2세기부터 남북전쟁, 근대현대까지 변칙예술은 언제나 예술과 함께해 왔고, 서로의 영향을 받아 왔다.
변칙예술이든, 비변칙예술이든, 그리고 예술 이외의 분야에서도, 1900년대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신과 율법보다 인간이 우선되기 시작하고, 이성이 중시되며, 자본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으며, 변칙성을 차단하여 정상성을 지키려 하는 주요 단체들이 급부상하게 되는 시기였다. 이 혼돈의 시기동안 변칙예술은 수많은 사조와 사건을 거치며 현재 Are We Cool Yet이라 불리는 운동, 이른바 '쿨함'이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가 '쿨함'을 논하기 전, 우리는 근대 역사속 변칙예술가들과 변칙예술품들을 바라보고 우리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쿨'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 인물과 사건 위주의 관점에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그것이 독자들의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시작하겠다.

클로드 모네, 인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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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하는 여인> 클로드 모네, 1873, 캔버스에 유채물감과 변칙적 섬광염료, 118*110 cm, 파리, 오르세 변칙미술관

1800년대의 변칙예술은 파리의 공식적인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내부의 비밀스럽고도 경직된 변칙예술가들의 지배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이들은 부유층을 상대로 한 초상화, 종교, 역사 등의 그림을 전통에 따라 그렸다. 이때의 변칙은 그저 작품을 '재미있게' 해주는 역할 밖에 없었다.
이후 이러한 전통에 반발하여 일어난 '변칙사실주의'와 '변칙인상주의' 사조는 변칙성을 전면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철학과 의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변칙인상주의' 화가로는 클로드 모네가 있다. 모네는 그림만으로는 완전한 빛을 표현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햇살의 밝은 빛을 흰색 물감으로 '흉내'낼 수는 있지만, 절대 눈부시게 밝은 빛은 아니었다. 그는 완전한 빛을 표현하기 위해 백열전구와 야광물질등을 이용하려 했지만 그가 원하던 강렬한 빛을 낼 수 없었다. 그는 당시 변칙성을 감시하던 프랑스의 단체 '암흑부Estate noir'의 눈을 피해 에콜 데 보자르를 중퇴한 여러 변칙예술가들과 비밀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모네는 변칙예술이 가진 잠재성을 알아보았고, 이후 그는 그 모임의 리더가 되어 이를 정기적인 예술 교환 서클로 발전시키게 된다.1 이 단체는 이후 "Des hommes cools"2이라 불리게 되며 현대 Are We Cool Yet 운동의 전신 중 하나로 일컫어진다.
이후 계속되는 "Des hommes cools" 활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다양한 국가의 대도시에 자리잡게 되었고, 특히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한 활동 “The cool guys”는 에드워드 호퍼를 중심으로 한 미국 사실주의 사조 이후 근대 변칙예술사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Des hommes cools"의 수명은 길지 않았는데, 1874년 내부 회원의 고발로 인해 단체는 암흑부에 의해 해산되고 그 해 있을 중요한 전시회 "Salon des Magnifiques"에 작품을 출품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클로드 모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 맞은편에 "Sommes-Nous Devenus Magnifiques?"라는 대항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 Are We Cool Yet의 탄생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쿨의 탄생>을 참조하기 바란다.)

개념미술

마르셀 뒤샹
뒤샹의 기행, 모더니즘의 성장과 더불어 기존의 회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뒤샹이 개척,

프리다 칼로, 초현실주의

수많은 사건이 있었던 1924년 전시회 이후로 변칙예술은 큰 변화를 겪었다. 변칙성에 대한 연구는 전보다 발전하였고,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변칙성 교육을 위해 “The cool guys”는 체계화된 조직이 되어가고 있었다. “The cool guys”의 회원이었던 디에고 리베라는 어느 한 국립 학교와 연이 닿아 벽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비변칙적 벽화를 그리는 일에 싫증이 났고, 몰래 변칙성을 숨겨 넣었다. 마침 휠체어를 타고3 그곳을 지나가던 프리다 칼로는 그 그림의 변칙성을 알아차리게 되고, 디에고 리베라는 이를 숨기기 위해 그녀와 말을 섞게 된다. 프리다 칼로는 남다른 카리스마를 가진 여성이었고, 리베라는 그런 그녀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는 프리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곧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되었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다.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변칙예술을 알려주었고, 그녀에게서 재능을 알아챈 그는, “The cool guys”의 가입을 권유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가입을 거절하게 된다.
모네 시절 때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전통인 ‘여성회원 금지’ 조항 때문이었다. 프리다는 이에 반발하며 “The cool guys”를 비판하는 작품을 그리게 된다. 그녀의 변칙예술은 다른 이들을 휘어감는 압도적인 매력이 있었으며, 멕시코의 전통적 주술과의 조화로 남미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동생 크리스티나와 함께 “The cool guys”의 이중성과 그들 스스로 권위적인 정통 미술만을 추구하던 경직된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와 같은 존재가 된것이 아니냐며 반-쿨 운동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The cool guys”는 이후 프리다를 공식적인 회원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가 “The cool guys”에 들어선 이후에 활발히 변칙예술을 시작하였고, 그녀는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 보는 식의 작품을 많이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진실된 사랑>을 만들었을 때,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사건이 생겼다.
그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작품이 관객을 바라본다. 작품은 관객을 꿰뚫어보고는 가슴속에 깊이 묻어둔 사랑하는 이를 비춰준다. 이러한 작품은 기존에 없던 변칙기법과 철학을 담고 있어 수많은 회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작품의 전시회는 성대하게 열렸다. 첫 관객은 프리다 칼로 본인이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디에고 리베라가 있었다. 두번째 관객은 그녀의 여동생, 크리스티나 칼로였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부모님이 있었다. 세번째 관객은 디에고 리베라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많은 여자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림 속 프리다는 그 수많은 인파들 중 한쪽 구석에 있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돌아서서 전시회를 나왔다. 그녀를 걱정한 다른 변칙예술가들이 그녀를 따라갔다. 프리다는 그들에게 울며 성토를 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The cool guys”는 오래전부터 디에고의 여성 편력을 알아보았지만, 그것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지향하는 분위기였다. 디에고는 이러한 여성 편력이 창의성을 복돋아 주게 하는 수단이라 생각하였고, 회원들 다수가 그것에 동의하고, 또 어느정도 주선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디에고는 이미 두번째 아내를 가진 상태에서 “The cool guys”를 통해 프리다와 불륜을 저질렀고, 결혼한 이후로도 크리스티나를 포함한 수많은 여성과 불륜을 저질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와 자신의 작품을 불태웠다. 만류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녀는 “The cool guys”를 자진해서 탈퇴한다. 디에고와 다른 회원들은 그녀에게 제발 여기 남아있어 달라고 간청을 하게 되고 여전히 디에고와 변칙예술을 사랑했던 그녀는 마지막 변칙예술 작품을 만들게 된다. 그 작품이 바로 전설적인 <나의 일부>이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 일부를 작품에 불어 넣음으로써 디에고와 변칙예술을 향한 애증을 자기 파괴적인 형태로 실현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건 인격체로써의 프리다가 아닌, 도구와 껍데기로써의 프리다 였다는걸 역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 이후로 프리다는 한평생 변칙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이후 디에고와 재혼을 하기도 하지만 전과 같은 생기를 보이지 않는다고 주변인들은 말했다. “The cool guys”는 이 사건이 공론화 되자 수많은 변칙 예술가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해체되게 된다.

1937년 뮌헨 퇴폐미술전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마크 로스코, 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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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312번> 마크 로스코, 1965, 캔버스에 밈 인자, 2*2 m, 뉴욕, MC&D사 금고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초상기술과 변칙성 연구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다. 기존에 변칙이라 생각되던 현상은 과학의 힘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물리학과 수학, 생물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마치 정교한 톱니바퀴 처럼 돌아가는 커다란 기계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이성을 제 1원칙으로 삼아 세계의 원리를 파악하려 했고, 이러한 움직임을 모더니즘이라 칭한다.4
마크 로스코는 비변칙 예술가로써 인간의 감정에 대한 고찰을 줄곧 해왔다. 그는 본래 전근대적 신화에 관심이 많았고, 인간의 감정은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모더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자 그는 과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야 말로 과학이 결코 밝혀낼 수 없는 궁극의 변칙으로 보았고, 그 감정은 비변칙적이고 단순화된 면과 색으로부터 나온다 믿었다. 그는 면과 색감이 주가되는 비변칙적 추상화를 그리는데 일생을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마지막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인간의 감정은 사회적 관계를 타고 흐르는 무언가, 문화의 상호작용, 생각의 흐름과 순환, 이 모든것을 통틀은 한가지 모호한 개념, 오늘날 밈이라고 부르게 된 개념이 바로 인간의 감정의 근원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변칙예술을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무제 312번>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한방울의 물감도 쓰이지 않은 흰 캔버스였으나 그 그림을 들여다 보는 모든 사람들은 휘몰아치는 감정의 물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변칙예술이자 유작인 <무제 312번>은 MC&D가 주최한 경매에서 변칙예술품 역대 최고가를 달성하였다.

팝아트(1956)- 앤디 워홀

포스트-모더니즘(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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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신원 미상, 1981, 금속 에어 커플러, SCP 재단

1945년까지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과 제7차 오컬트대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이 두 사건은 인류에게 있어 이성의 반란이라 불릴 만한 대표적 사건이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더욱 넓어지고, 과학과 초상기술은 발전해 나가지만, 정작 인간은 그것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며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세계를 먹어치우는 자, 에어커플러

현대의 변칙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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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깨어나다> 엘리자베스 아르투로, 2014, 캔버스에 피와 탄흔, 110*110 cm, 스리포틀랜즈, 스리포츠 갤러리아

해학적- 마침내 깨어나다, 뱅크시(최후의 만찬을 욕하는 레딧 유저들. 내가 그려도 저거보단 잘그리겠다)
내면의 분노- 바스키아, 야간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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